2019

모리스 라벨, La Valse

39기린 2019. 6. 18. 12:56
라벨은 아마도 자신의 대표곡 중 하나인 볼레로보다도 덜 유명한 작곡가일 것이다. 그런 점은 나처럼 취미로 피아노 하는 사람들에게도 예외는 아닐 것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쇼팽 같은 작곡가들이 치기 쉬운 곡부터 어려운 것까지 다양한 곡을 써서 어려운 곡이라도 차츰차츰 도전하게끔 욕구를 자극하는 반면에 그 이후의 작곡가들은 그런 자비 없이 마냥 어려운 곡들을 써서 나 같은 인간들이 도저히 해볼만한 생각이 안들게끔 하기 때문이다. 인지도도 좀 떨어지기도 하고.

라벨의 라 발스 역시 그런 곡 중 하나다. 처음엔 관현악곡으로 만들어졌고, 편곡의 천재답게 이후에 2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과 피아노 독주를 위한 곡으로 만들어졌는데 세 곡이 주는 느낌이 제각각 다른 것이 무척 재미있다.

관현악 버젼이 다양한 악기로 풍성함을 넘어서 정신 사나울 정도의 소리를 내며 조화를 이루는 걸 듣고 있으면 화려하고 왁자지껄한 서커스 쇼를 보는 느낌이라고 한다면, 피아노 독주 곡 같은 경우에는 그 성질이 180도 달라지는데 저음부에서 마치 천둥치기 전 구름이 조용히 쿠르릉 거리는 인상으로 시작하면서 동시에 괴기한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고음부의 멜로디는 대혁명 이전 프랑스의 스테레오 타입 중 하나인 우아하고 귀족풍의 뭔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와중에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글리산도는 마치 뒤에 뭔 일이 터질 것만 같은 떡밥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마치 19세기 말엽의 어느 궁정에서 벌어지는 궁정 파티가 생각나는데, 단순한 파티의 모습만을 그리고 있지 않고, 궁 지하에서 왕정을 무너뜨리기 위한 레지스탕스의 암약 역시 동시에 한 곡에서 잘 그려내고 있는 것 같다. 마치 20세기 초기에 나왔던 그런걸 주제로 한 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이랄지. 제목은 분명 왈츠건만 고음부가 왈츠 리듬을 따라가는 거에 비해 저음부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도 장면정도가 아니라 아예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상을 떠올리도록 하기위해 의도된 것이 아닐지.

주제를 여러번 반복해가면서 곡이 클라이막스로 치닫게 되면 강한 저음과 아르페지오가 반복되면서 매서운 고음 연타가 나오면서 곡이 마무리 되는데 여태까지 열심히 반복한 아름다운 주제가 완전 박살이 나는 모습이 앞서 말한 레지스탕스가 테러에 성공하여 파티가 난리가 난 장면이 연상된다. 아믈랭의 서커스 갤롭의 마지막도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쇼가 급작스럽게 중단 되는 것처럼, 라 발스 역시도 그런 식의 마무리를 택한게 굉장히 재밌다. 다른 왈츠들처럼 얌전히 끝냈다면 아마 곡의 인상도 달라졌을 것이다. 처음에 라 발스를 접했던 건 이 클라이막스 부분이었는데 이게 도데체 어디기 왈츠라는 건지 의문이 들었는데 곡의 전체를 들으면 굉장히 납득이 가는 마무리지 싶다.

애초에 이 곡은 빈 왈츠에 대한 헌사 같은 느낌으로 만든 곡이라는데, 이 정신 없다 못해 기괴한 느낌을 주는 곡의 어디가 빈 왈츠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젠 빈 왈츠의 시대는 완전히 끝났어요 하는 선언문 같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