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약 절반 시점 리뷰.
지금 거진 절반 정도 진행된 고거전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오랜만에 돌아온 대형사극-32부작이지만-이고, 소재도 또말선초나 주인공들이 수염 한톨 나지 않던 퓨-전 사극이 아닌 나름 신선한데다, 사극왕 또수종의 모처럼 정통사극 복귀작이니 일단 본방사수 철저히 해가면서 보고 있지만, 잘 가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불안불안한게 지금 고거전을 보는 내 기분이다.
보는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건 역시, '전쟁'을 소재로 다루고 있는 사극답지 못하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흥화진 전투까지는 매우 훌륭했고, 프롤로그 격의 미리보는 귀주대첩 역시도 기대감을 증폭시키는데 한 몫 했는데, 아무리 빠른 전개가 목적이라 한들 기록상 30만 대 40만이 제대로 붙었을 통주 전투가 강조의 기습 피랍쇼로 허무하게 끝난 것은 하차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30만 대군이 정말 무질서하게 사분오열 와해되는 모습이라도 제대로 그려서 고려가 진짜 위기임을 보는 사람이 실감했어야 했는데 고려의 위기를 느낄 수 있는게 고작 척후병의 보고에 의한 것이라니 황당하다. 분명 거란은 40만 대군인데 통주 전투 이후 나오는 전투장면이라고 해봤자 퓨-전 사극에서나 볼법한 소규모 난전 뿐인데다가 그 난전에서도 거란군이 2열 종대로 구보하듯이 뛰어오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결국 이렇게 되는건 비용문제 때문이라 생각되는데, 고증을 이상할정도로 철저히 지키는걸 넘어서 흥화진 전투에서 양규가 활을 쏠 때 손가락을 비틀어서 쏜다던가, 활 시위를 고증에 맞춰 갈아 끼우는 모습이라던가, 전투 이후 적의 포위망을 파악하기 위해 야심한 밤에 말 발굽에 천을 씌우는 자잘한 디테일을 챙길바엔 허무하게 지나간 서경 공방전이나, 개경 함락, 흥화진 전투 이후 양규의 곽주 탈환을 위한 30명(...)의 병사들을 신경쓰는게 낫지 않았을까. 암만 비용문제라도, 10년전 드라마인 50부작 짜리 정도전이 마찬가지로 저예산으로도 그럴싸한 cg와 연출을 이용해 처절한 전투-특히 황산대첩-을 정말 잘 살렸는데 10년의 시간이 흐르도록 뭘했나 싶다. 사극 처음하는 사람들도 아닌데.
제작진들을 보면 연출하시는 분이 임진왜란1592를 하셨고, 작가는 태종 이방원을 쓰신 분인데, 임진왜란1592는 완벽한 승리로 끝난 노량해전을 쓸데없는 신파강조를 위해 승리는 했으나 거북선 승무원 전원이 사망한것처럼 연출해서 보는 내가 욕을 한 적이 있고, 태종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이 끝났음에도 얼타는 이방원을 보면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하차를 해버린 드라마인지라, 고거전의 미래가 좀 염려가 된다. 안 그래도 서경 공방전은 10초정도 보여줬으면서 개경이 함락되고 난 이후에 거란을 악마로 묘사하기 위해 거란군이 개경 주민을 괴롭히는걸 쓸데 없이 5분 넘게 보여주는 연출의 궁극적인 의도를 잘 모르겠다.
다행인것은 장점도 분명하다는 것이다. 고증을 잘 지켜가면서 역사의 큰 줄기에 맞춰 극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그렇고, 대부분의 배우가 연기를 잘한다는 것이 그렇다. 몽진 직전 현종의 자살기도는 분명 기록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설득력 있게 잘 그려졌고, 몽진 이후 거란의 2차 침공이 끝날때까지 이렇다 할 기록이 없는 강감찬의 동분서주 활약도 그럴싸하다. 귀주대첩을 향한 거대한 빌드업을 위해 소배압과 강감찬 간의 라이벌 관계를 만들어 두는 것도 좋고.
여태까지의 장단점은 이제 그렇다치고 걱정이 되는 것이, 이 드라마가 벌써 거진 절반이나 됐는데 빠른 전개를 표방하는 드라마가 어떻게 남은 이야기를 풀 것인가 하는 것이다. 초반엔 분명 엄청 빠른 전개로 인해 목종이 3회만에 죽고 강조가 부월 받고 전투 한번 하자마자 통주 전투가 끝났는데, 중반쯤 오니 현종은 아직도 의정부에 있고 거란은 이제서야 남하할 결정을 했다. 그리고 다음회에는 드디어 공주에서 새 황후를 얻는데, 다음회까지도 몽진이 안 끝나니 나주까지는 언제 몽진할 것이고 거기서 한국 역사 최대 위기였던 현종-거란 본진간의 초 근접한 거리는 언제 표현하며, 2차 침공이 언제 끝날까 싶다. 분명 초반에 김훈, 최질의 난에 대한 복선을 깐걸 보니 그걸 보여주긴 할텐데 그거 보여주고, 3차 침공때 현종이 개경에 남아 거란의 300명 정예를 박살내는건 어느 세월에 묘사할 것이며, 분명 클라이막스인 귀주대첩에 많은걸 보여줄텐데 아직도 현종이 지방 호족들한테 굴욕이나 당하고 있으니 고려와 거란의 대규모 군대를 보여주기 이전에 제대로 이야기를 끝내기나 할지 매우 크게 염려된다.
아직 그정도는 아니지만, 비용 문제로 중요 전투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빠른 전개를 위해 구도를 압축하다보니 결국 재미마저 날려먹은 징비록의 냄새가 고거전에서 슬슬 풍기는 것 같다. 가뜩이나 임진왜란1592와 태종 이방원의 기억으로 제발 그렇게 되지만을 않길 바라고 또 바라지만, 그렇게 된다면 갈 길은 딱 두가지 뿐이다.가뜩이나 정통 사극 하나 만들기 꺼리는 시대에 사극이 없어지는 꼴은 차마 볼 수 없어 이정도면 잘했어 우쭈쭈하면서 꾹 참고 보던가, 정도전을 정주행하는 것.